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할아버지, 그리고 외 할아버지...
그래서 그분들 얼굴도 알지 못합니다만, 다행히도 외할머니는 참 정정하셨습니다.
부모님 다음으로( 혹은 그에 못지않게 ) 저와 동생을 가장 많이 사랑해주셨던분.
너무 정정하셔서 본인의 집에서부터 부모님집까지 걸어다니셨던 분.
그런데 한석달전부터 갑자기 거동이 불편해 지셨습니다.
손에 힘이 없어 숟가락만 겨우들어 식사하시던 할머니..
침도 맞고,물리 치료도 받았지만 그다지 나아지지않던 할머니를 보시고, 결국 어머님과 함께 좀더 큰 병원에 가서 MRI를 찍었습니다.
의사가 저보러 할머니와 대기실에 있으라고 하더군요.
한참을 의사와 이야기하고 나온 어머니와 함께 바로 입원 수속을 밟고, 할머니를 입원시켜드렸습니다.
복도에서 두 눈이 충혈된 채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 " 폐암이 이미 많이 전이가 되어서 뇌까지 퍼졌다더라 길어야 육개월 사신단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채 풍이와서 그런거니 여기서 치료 잘받고 잘 드시면 낫는다는 말에 기운을 얻으신 할머니는
밥한공기 뚝딱 맛있게 잘 드시고, 계속 안부 인사오는 지인들과 가족들 사이에서 행복해 하셨습니다.
" 병원에 있으니 좋다 때되면 밥나오고, 쾌적하고 사람들 볼 수있고. " 할머니는 본인의 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입원하시고 일주일쯤 지나시자 스스로 걷고, 다 낫은 사람처럼 보이시던 할머니는 그 반짝의 건강함을 뒤로하고 홀연히 돌아가셧습니다.
돌아가시면 옷을 입히기 힘드니 속히 할머니 집에가서 한복을 가져오라는 주위분들의 말에 급하게 나간 어머니를 뒤로하고..........
전화를 받고 뒤늦게 달려온 어머니는 왜 기다리지 못했냐며 통곡을 하셨고, 모두들 참 많이 울었습니다.
가진 재산도없이 홀로 외로이 사셨던 할머님이셨는데도,
그분의 장례식장에는 삼일내내 기도하러오시는 신자분들과 지인분들로 가득차있었습니다.
참 사시는동안 덕도 많이 쌓으시고, 행복하게 가셨구나 저희 가족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가진게 없던 할머니는 그래도 뭔가를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에,
본인의 집에서 우리집까지 손수레를 끌고와서 옥상에 농사지은 야채들을 담아서는
다시 돌아가서 그것들을 나누어주곤 했었다는것도 사후에 알았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유품을 정리하고....
모든 정리를 마무리하고나자 어머님이 저와 동생에게 각 백만원씩 나누어 주셨습니다.
" 은행에가서 할머니 재산을 보니 천만원이 넘게 저축을 하셨더구나, 그래서 이렇게 주기로 했으니 할머니가 주는 마지막 용돈이라 생각하고 잘 써라...."
버스비조차 아까워 왠만한 거리를 걸어다니시고,
한겨울에 맛난거 사들고 집에가면 냉기로 가득차있던 할머니의 집..
그 보일러기름값 아끼고, 전기장판하나로 겨울 나시면서 저축하신 소중한 돈이란걸 생각하니 함부로 만질 수 조차 없었습니다.
벌써 임종하신지 10일이 되었지만 지금도 기분이 멍하고, 온통 할머니에 대한 추억만 가득하네요.
병원에 온 어린 증손자가 링겔 꽃고있는 할머니 주위를 위험하게 뛰어다녀도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분.
이제 조금있으면 퇴원해서 다시 남을 위해 기도하러 다니고, 문병온 사람들에게 인사할수 있겠다며 웃음짓던 분.
항상 묵주를 들고 다니시면서 가족을위해 주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주시던분.
임종 전날 의식도 거의 없이 눈도 못뜨시더니 증손자가 왔다는 말에 힘겹게 눈을 떴다가 감으시던 분.
임종때까지 본인의 병을 모르시고 행복하게 눈을 감으신 분.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자꾸 눈물이 고이는건 어쩔 수 없네요.
부디 그 많은 사람들의 기대대로 좋은 곳에서 지상에서 누리지 못한 행복 다 누리시길 바랍니다.
외할머니 정말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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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님이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 할머님의 두눈에선 눈물이 살짝 흘렀습니다.
그 순간 할머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던걸까요.
지금도 할머니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